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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라스베가스 인근 드라이브 하기 좋은 곳, 레드락 캐년(Red Rock Canyon)

미서부/미서부 16,000km의 여행기록

by 라임스톤 2019. 5. 23.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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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겁의 시간이 흐른 듯하다. 두꺼운 커튼이 한 줄기 햇살마저 완전히 차단한 터라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에서는 도무지 시간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다소 무거운 몸을 일으켜 시각을 확인한 순간, 왜 그토록 배가 고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1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커튼을 열어젖히자 눈부신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들어온다. 창밖 풍경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차들로 부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꿀맛 같은 잠이었다. 시차가 바뀐 첫날은 너무 이른 아침에 잠이 깨고는 했는데, 이렇게 점심때까지 잔 것을 보니 달콤한 잠에 빠졌던 것 같다.
사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늦은 시간에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일쑤다. 낮보다 밤이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이기에 격정의 밤을 즐기다보면 새벽까지 이어지기 십상이다. 결국, 다음 날은 피곤한 몸으로 늦게까지 잘 수밖에 없다. 뭐, 이런들 어떠하리···.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아침형 인간일 필요는 없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도 자책하지 말자. 여기는 밤의 도시니까···.

라스베이거스 인근의 드라이브 코스
늦은 점심을 차려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는데도 머리가 묵직하다. 시차 탓인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서 그런지 모를 일이다. 스트립의 밤은 아직 멀리 있다. 이런 오후에는 라스베이거스 근교로 가벼운 드라이브를 나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반나절이나 한나절을 투자해 다녀올 만한 곳은 4곳 정도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하다. 라스베이거스 서쪽에 인접해 있는 레드락 캐니언(Red Rock Canyon National Conservation Area), 그 위쪽의 찰스턴산(Mt. Charleston) 지역, 라스베이거스 동쪽의 후버댐(Hoover Dam)과 불의 계곡으로 유명한 주립공원(Valley of Fire State Park)이다. 물론 시간을 더 들여 Death Valley 국립공원에도 다녀올 수 있겠지만, 하루를 모두 투자해야 하는 만큼 나중에 다시 다루는 것이 좋을 듯하다.

 

라스베가스 인근에 다녀올 만한 드라이브 코스 (레드락캐년, 불의계곡, 후버댐, 찰스톤)

레드락 캐니언은 스트립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낮 동안에 잠시 가벼운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번잡한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또 라스베이거스가 세워진 사막과 이를 둘러싼 자연환경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한번 가 볼 것을 권한다. 그러나 한나절 이상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면 차라리 불의 계곡에 다녀오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앞서 말한 4곳 중 단연코 가장 인상적인 곳은 불의 계곡이다. 거리가 가장 멀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후버댐 역시 거리도 가깝고 괜찮은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 수 있다. 그랜드캐니언으로 가는 길에 있으니, 이곳에 가는 여정이 계획되어 있다면 그 스케줄 중간에 가볍게 넣어 놔도 될 것이다. 
그러나 찰스턴 지역에는 가 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모르겠다. 레드락 캐니언에 다녀오면서 들르거나 불의 계곡에 다녀오면서 들러도 되지만, 힘겹게 시간을 쪼갤 필요는 없다. 차리리 불의 계곡에 시간을 더 할애해 좀 더 여유로운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이 낫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 근교의 이런 공원들은 어디까지나 시간이 여유로울 때 다녀올 것을 추천한다. 이곳의 핵심은 역시 라스베이거스와 스트립이다. 이 거리를 즐기는 것이 이곳을 방문한 첫 번째 목적인 것이다. 굳이 다른 곳에 한눈팔 필요는 없다. 
만일, 라스베이거스가 처음이라면 우선 스트립에 집중한 후, 여분의 시간이 있는 경우에만 기분을 전환할 겸 다녀와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 방문이 두 번 이상이라면, 이런 곳들도 미리 계획하여 한 번쯤 다녀올 만하다. 혹시 그랜드캐니언이나 그 너머 서부로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불의 계곡이나 레드락 캐니언을 과감히 지나쳐도 된다. 굳이 에피타이저가 필요하지 않다면 말이다.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더 위대한 자연을 마주하게 된다면 이곳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초라해질지도 모른다.

 

Red Rock Canyon National Conservation Area_BLM Photo


Red Rock Canyon
하늘은 잔뜩 흐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태양이 내리쬐면 햇빛을 피하고 싶을 정도로 뜨겁지만, 이렇게 구름이 끼면 여기가 사막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선선하다. 라스베이거스의 밤을 맞이하기 전에 무거운 머리를 달랠 겸 호텔을 나와 레드락 캐니언으로 차를 몬다.

 

흐린 날의 레드락 캐년의 풍경


스트립에서 레드락 캐니언까지의 거리는 대략 40km에 조금 못 미친다. 다소 복잡한 도심을 빠져나와 159번 도로에 들어서자 트래픽은 많이 줄어들었고, 시원스레 뻗은 도로는 금방 레드락 캐니언으로 데려다준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 공원 방문객 센터(visitor center)에 도착한다. 

 

레드락 캐년 안내 지도


방문객 센터는 한산했다. 날씨가 흐린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붐비는 유명한 국립공원도 아닌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드라이브 온 일부 관광객들만이 눈에 띌 뿐이다. 스트립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많은 사람과 마주쳐 봐야 좋을 게 뭐 있겠는가. 드라이브는 역시 한적한 길이 최고지 않을까.

 

Red Rock Canyon_BLM Photo


레드락 캐니언은 방문객 센터에서 시작해서 21km의 일방통행 도로(Scenic Drive)를 따라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곳곳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정차하거나 주차한 후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하이킹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트레일도 있다. 그러나 하이킹을 즐기지 않고, 차를 몰아 이 드라이브 코스를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이곳을 감상하는데 부족하지 않다. 
방문객 센터를 빠져나와 Scenic Drive로 들어선다. 사실, 이곳 방문객 센터에는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될 듯하다. 유명 국립공원을 간다면 우선 방문객 센터에 들러 그 공원에 대한 배경이나 정보를 얻는 것도 큰 즐거움이자, 그 공원을 구경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만큼 되도록 놓지지 말고 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하지만 이곳은 아주 중요한 사이트는 아니므로 경치를 즐기며 드라이브하는 것에 좀 더 집중하는 게 좋을 것이다.

 

Red Rock Canyon_BLM Photo


도로는 아주 말끔하게 잘 관리되어 있다. 제한속도가 낮으므로 천천히 운전하면서 주위 풍경에 집중한다. 이런 곳에서 앞차나 뒤차를 의식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아무리 늦게 달려도 누구 하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알아서 추월하든 할 테니, 내가 만족할 만큼 구경하며 달리면 된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곳에 주차하고 주변을 감상하면 그만이다. 

 

레드락 캐년의 붉은 사암과 드라이브 도로


도로 오른편으로 붉은색 사암(sandstone)으로 구성된 바위산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이곳의 대지와 정말 잘 어울리는 색상인 것 같다. 누런 대지와 붉은 바위 그리고 맑은 날 이들의 색채를 더욱 진하게 만들어 줄 사막의 붉은 태양···. 그러나 오늘 이곳은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자취를 감춘 탓인지 흐린 하늘만큼이나 그들의 색채도 탁하다. 역시 이런 황무지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빛나야 제 색깔을 낼 수 있는 듯하다.

 

레드락 캐년의 붉은 사암


분명 이 대지의 색채는 내가 기대했던 그것은 아니었지만 드라이브하기에는 나쁘지 않다. 선선한 기온 그리고 깨끗한 공기가 차 안으로 가득 들어온다.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날씨 저런 날씨 모두 마주치게 된다. 청명한 하늘을 원하는 게 여행자의 바람인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항상 운이 좋을 수는 없으니 이런 날씨도 즐기면 그만이다. 내일은 또 다른 날씨가 다가올 테니 말이다.

 

레드락 캐년의 붉은 사암과 트레일


아무튼 대단한 풍경은 아니지만, 이 도로는 정말 마음에 든다. 한적한 강원도의 후미진 어느 도로를 달리 듯, 스트립의 북적거림에서 잠시 벗어나 한가롭게 운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이브는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밤이 되면 이곳 어디쯤에서 저 멀리 라스베이거스의 야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대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는 기분이란···. 그리울까, 슬플까.

 

레드락 캐년의 안내표지판
레드락 캐년의 풍경



두 번째 밤
다시 돌아온 스트립에서 밤을 기다린다. 아직은 지평선 위에 구름 사이로 제 몫을 다 하고 있는 태양을 도시의 불빛이 서둘러 끌어내리려는 듯 스트립은 벌써 요란한 조명으로 물들고 있다.
야외로 나갔다 와서인지,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그래서인지 스트립이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이미 익숙한 공간이라 그런지 부산하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다. 처음 왔을 때는 가 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고통스러웠다. 이 호텔, 저 호텔 모두 구경해 봐야 할 것 같고, 그 유명한 쇼도 봐야 하고, 이 넓은 거리를 눈에 다 넣어 봐야 할 것 같고 또 사진에 담아야 할듯한 사명감에 마음은 급하고 다리는 아팠다. 무언가에 쫓기듯이 여행을 해서는 안 되는데, 여행자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욕심에 물들 수밖에 없고 또 그러다 보면 질보다 양에 집착하게 된다. 어쩔 수 없으리라. 언제 또 올지도 모르는 곳인데, 하나라도 더 보고 가야 하는 것이 우리가 마주한 딜레마다.

라스베이거스 쇼
라스베이거스를 대변하는 것은 아름다운 호텔과 카지노라고 할 수 있지만, 쇼를 보지 못한 스트립의 기억은 50점짜리에 불과할 것이다. 
엄청난 무대 장치와 화려한 연기자들의 액션···. 라스베이거스에 방문한 관광객이라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보고 가야만 한다는 그 유명한 라스베가스 쇼···. 
라스베이거스에는 수많은 쇼가 있고, 그중에서 혹자들은 벨라지오의 O, Wynn의 Le Leve 그리고 MGM의 KA를 3대 쇼라 칭하며, 반드시 봐야 할 무대라고 입을 모으고는 한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 세 가지 쇼가 발군인 것만은 분명하다. 생전 처음으로 서커스와 연출이 결합된 이런 쇼를 본다면, 어떤 것을 봐도 대단한 감동에 휩싸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Le LEVE가 가장 인상적이었으며, 다음으론 O,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된 KA쇼가 인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에 처음 방문해 이 쇼들을 모두 볼 필요는 없다. 결코 만만치 않은 관람 비용은 둘째 치더라도, 무대 장치와 주제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서커스 쇼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며칠 머무는 동안 이들 쇼를 모두 본다면, 나중에 보는 쇼일수록 감동의 강도가 약해지고 또 흥미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단지 쇼를 보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를 찾은 것이 아니라면 한 번의 쇼 관람이 오히려 그 여운을 지속시키는 데에는 더 유리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를 위해 남겨 두자. 약속된 미래는 아닐지라도, 나의 삶을 믿고 다시 올 수 있도록 다짐하면 된다.
또한 좋은 좌석을 위해 쓸데없이 비싼 값을 치르지 말도록 하자. 특히 Le LEVE는 원형 무대일 뿐 아니라 좌석도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또 무대와의 거리가 가까운 편이므로 어떤 좌석에서도 관람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 따라서 가장 낮은 등급의 클래스라도 감동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으니 제일 저렴한 좌석으로도 충분하다.
O나 KA는 일반 공연장과 같은 한 방향으로 관람하는 무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좌석 위치에 따른 시야각의 차이가 다소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좌석 위치에서 쇼를 관람하는 데는 역시 별 무리가 없다. 비싼 클래스의 좌석이 주는 가성비가 썩 좋지는 않으니, 저렴한 클래스의 좌석 영역 중 중앙 부근에서 잘 고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너무 고민하고 욕심낼 것 없다.
아무튼 처음 이 쇼를 봤을 때의 흥분과 감탄은 아직도 선명하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이 공간에 모인 모든 관람객이 소리 없는 감동으로 눈동자가 빛나고 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다. 비교적 감정을 억누르는 데 익숙한 동양인에 비해 미국인이나 서양인들은 그 감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한다. 그래, 맞다. 이렇게 잘 짜인 완벽한 쇼를 볼 수 있는 곳은 지구상에 흔치 않다. 
그 어떤 찬사로도 이처럼 훌륭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을 저 연기자들에게 감동을 표현할 길은 없을 듯하다.

Glitter Girl Neon Sign at the Freemont Street Experience, Las Vegas_photo by Carol M. Highsmith, 2009



카지노
라스베이거스에 왔으니 카지노에 들르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일반적으로 관광객이 카지노에서 게임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취향에 달렸다. 이런 게임에 취미가 없거나, 재미없게 느껴진다면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마치 불결한 행위인 듯 바라보는 것은 라스베이거스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니, 굳이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도시는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니까···.
한국인에게는 ‘고스톱’의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는다면 소소한 돈으로 가볍게 즐기는 것도 여기 라스베이거스에서 누려야 할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만큼 욕심을 버리고, 한두 시간 승부욕을 살짝 일으켜보는 것도 좋은 기억이 될 듯하다. 단, 애초에 현금을 많이 가져가지는 말아야 한다. 카지노 게임에 재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지갑의 돈을 있는 대로 꺼내 쓰기 십상이다. 욕심을 버리고 조금만 잃을 각오로 자제력을 발휘해 봐도 결국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쏟아붓기 쉬운 곳인 만큼 이곳의 유혹은 그리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카지노 산업이 왜 이렇게 번영했겠는가.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는 일인 만큼 아주 치밀하고 은밀하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웬만큼 운이 좋지 않고서야 돈을 따기는 버거울 것이다.
그러니 돈을 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라스베이거스를 즐긴다는 생각으로 참여해 보자. 무엇이든 좋다. 테이블 게임이든, 슬롯머신이든 상관없다. 정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은 블랙잭이나 포커와 같은 테이블 게임이지만, 이런 룰의 게임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슬롯머신도 괜찮다. 물론 기계한테 당신의 운명을 가를 전권을 넘겨 주었기 때문에 그날 돈을 딸지 말지는 오로지 기계한테 달렸다. 굳이 간섭할 수는 없지만, 그런 단순함이 오히려 독이 되어 빠져나오기 더 어렵게 만드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슬롯머신을 하게 되더라도 기본 배팅액이 적은 기계를 찾아 1불 이하의 최소 배팅으로 플레이하도록 하자. 그것이 최대한 오래 버티며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맥시멈 배팅으로 플레이해야만 짜릿함과 동시에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미니멈 배팅에 비해 맥시멈 배팅의 어드밴티지와 스릴은 생각보다 훨씬 커서 돈을 따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순식간에 가진 돈을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좀 더 오래 플레이하느냐, 제대로 재미를 느껴 보겠느냐는 오직 본인의 선택에 달렸지만 이 게임의 결말은 대부분 아쉬움과 씁쓸함이 동반한다. 
아무튼 쓸데없이 자신의 운을 믿지 말고, 기계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가끔씩 터지는 행운에 만족하고 일어서도록 하자. 오래 앉아 있어 봐야 별다른 행운은 찾아오지 않는다. 가끔 기계를 잘 만나면 돈을 좀 딸 수도 있다. 어쨌든 넣은 돈을 모두 잃었거나 2배 정도 땄을 때 게임을 멈추고 일어서야 한다. 모두 잃었다면 미련없이 떠나자. 다행히 운 좋게 착한 슬롯머신을 만나서 돈이 두 배로 늘어났다면 3배로 늘리고자 애쓰지 말자. 운이 좋아 3배 혹은 4배를 딸 수도 있는 반면, 자제력은 오히려 떨어져 그로 인한 중독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딴 돈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결코 내가 잘해서 딴 돈이 아니다. 기계의 변덕일 뿐이니 더 이상 바랄 필요는 없다. 

나도 100불로 슬롯머신을 시작해 5배 이상의 돈이 누적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고, 피크일 때 멈추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게임 중에는 결코 자신의 피크를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플레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카지노 측이 돈을 따게 되는 것이 이곳의 룰인 것이다.
좀 더 능동적으로 게임을 하고 싶거나 게임 룰에 익숙하다면 테이블 게임도 좋을 것이다. 블랙잭 같은 카드 게임은 비교적 룰도 단순하고 또 내가 결정해야 할 상황별 옵션도 대부분 정형화되어 있어 고수가 아니어도 쉽게 참여할 수 있다. 사실, 테이블 게임을 하게 되면 슬롯머신은 잘 찾지 않게 된다. 오로지 기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버튼만 눌러 대는 슬롯머신보다는 내가 능동적으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딜러를 비롯해 다른 플레이어처럼 기계가 아닌 사람과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데에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운이 따라야 함은 어쩔 수 없다.
대학 시절에는 하숙집에 옹기종기 모여 선후배들과 포커를 종종 즐긴 적이 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늘상 다니던 당구장을 벗어나 이런 서늘한 예기가 휘감는 전쟁터를 꾸리고는 했다. 말이 전쟁터지, 돈 없던 대학생들에게 판돈이라고 해봐야 얼마나 되었겠는가. 그 시절 호주머니 사정이란 잃어도 별거 없고 또 따도 별거 없었다. 하지만 물리기 당구가 관습처럼 굳어졌던 시절인 만큼 작은 용돈마저도 하루의 배고픔과 비교해야 할 만큼 쉬운 돈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배수의 진을 친 우리의 치열한 결투는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보다 더 재미있었던 거 같다. 그래도 낭만은 있었으니···. 
요즘처럼 PC방에서 게임하는 것에 비하면 놀 거리는 많지 않았지만, 아직 아날로그 감성이 저물지는 않았기에 오래 기억되는 예전의 명곡처럼 그 기억들도 사뭇 아름답게 기억되고는 한다.

New York Casino Hotel in Las Vegas, Nevada_photo by Carol M. Highsmith, 1980



운수 좋은 날
아내가 오늘만큼은 일하러 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며 힘없는 목소리로 부탁을 해도 인력거를 끄는 주인공은 오히려 그런 아내에게 핀잔을 주며, 약간의 돈이라도 벌고자 가혹한 거리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의 어두운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이상하리만치 오늘은 운수가 좋은 날인 듯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인력거꾼의 귀가는 더 늦어진다. 그는 여느 날보다 두둑해진 벌이로 아내가 좋아하는 설렁탕을 사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눈을 감은 아내의 시신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주인공은 아내 앞에서 오열한다.

그것이 설렁탕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근대문학 작품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인문학도였다는 것은 아니다. 공대 성향이었던 나는 오히려 자연대에 지원했다. 아무튼 저 소설을 읽고 매우 슬퍼했던 기억이 난다.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추운 겨울밤에 읽으면 더욱 눈물을 자아내는 소설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오늘 정말 운수 좋은 밤이기 때문이다. 저런 반전이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런 결말에 대한 후반부는 좀 나중에 살펴보고, 오늘만 보면 분명 운수 좋은 날인 듯하다.

잭팟이 터졌다. 스트립을 구경하다 들어간 Palazzo 호텔에서 피곤한 다리도 쉴 겸 100불을 넣고 슬롯머신을 돌렸다. 한동안 오르락내리락 거듭하던 끝에 어느덧 돈을 모두 잃어 갔고, 결국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돌릴 수 있는 60센트의 돈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일어서야지, 하는 안타까움과 체념 그리고 이 정도 놀았으면 됐지, 하는 위안과 함께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돌기 시작한 다섯 개의 휠은 너무나도 빠르게 멈춰 버렸다.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그리고 가장 높은 등급인 그림 다섯 개가 똑같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어떤 밀당도 없이 그렇게 순식간에 멈춰 버린 휠은 요란한 붉은 불빛으로 화려하게 빛났고, 슬롯머신은 금세 요란한 음악과 함께 잭팟을 알려 주고 있었다. 
최후의 순간에 갑자기 찾아온 행운으로 얼떨떨했지만, 이 상황을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필요 이상 시끄럽던 기계 소리에 조금은 멋쩍어지기까지 했지만 분명 잭팟이었다. 잭팟이 무엇인가. 가장 높은 조합이다. 그리고 당연히 가장 높은 배당금이 떨어진다. 복권으로 따진다면 1등에 당첨된 것이다. 그렇게나 낮은 확률의 잭팟이 이 마지막 순간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정말로 운수 대통한 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720불! 이게 뭐냐고? 그렇다, 잭팟에 대한 배당금이다. 팔자를 바꿀 만한 많은 금액이 아니어서 아쉽기도 하지만, 최소 배팅액으로 휠을 돌려 잭팟이 터지는 경우 이 기계가 주는 최대한의 돈이다. 그렇다. 난 무지막지한 잭팟 배당금을 주는 슬롯머신이 아니라 소소하게 놀 수 있는 서민적인 기계에서, 그것도 가장 작은 단위로 휠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더 큰 단위로 배팅해서 잭팟이 나왔다면 저 금액보다 다섯 배에서 열 배 정도는 더 많은 돈을 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니다. 그 둘의 경우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 최대치로 배팅했어도 잭팟이 나왔으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오히려 더 빠르게 돈이 말라 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60센트로 720불이면 1,200배의 돈을 번 것이다. 물론 앞서 100불을 투자했기 때문에 이를 빼야 순수한 수익이겠지만, 아무튼 엄청난 비율임에는 틀림없다. 천 원도 안되는 돈으로 80만 원을 벌었으니 말이다. 배당금의 규모보다는 잭팟이 나왔다는 것에 만족감은 더 컸다. 적은 돈으로 열심히 휠을 돌린 내가 안타까웠는지, 이 슬롯머신이 큰 선물을 해준 듯하다. 상징적인 큰 선물을···.
정말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만한 금액이 아니었기에 주변에서 몰려들 리 없었지만, 액수에 비해 요란했던 기계 소리는 마치 나를 백만장자라도 만들어 준 것처럼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런 요란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을 즐기기 위해 음악이 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꿋꿋이 버텼다. 그러나 정신없는 소리에 놀라 그 순간을 촬영해 놓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기에  남겨놓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한 후 두둑해진 지갑을 들고 그곳을 나왔다. H는 아직도 그 순간이 신기한 듯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기계를 뒤돌아봤다. 이 돈으로 맛있는 뷔페를 사 줘야겠다. 

바깥 풍경은 더 없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오늘밤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그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Casino interior, Las Vegas, Nevada_photo by Carol M. Highsmith,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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