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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랜드 캐년에서 페이지(Page)로 가는 길

미서부/미서부 16,000km의 여행기록

by 라임스톤 2019. 8. 6.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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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ert View
64번 도로를 타고 South Rim을 빠져나간다. 혹시나 하고 Yaki Point로 차를 돌려 봤지만 역시나 일반 차량의 통행은 금지되어 있다. Kaibab Trail을 실현시킬 날이 오면 그때 다시 방문하기로 하고 차를 돌려 동쪽으로 달린다. 
처음 이 South Rim의 64번 도로를 달릴 때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Kaibab 국유림을 달리면서 왼쪽으로 간간이 보이는 그랜드캐니언을 엿보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운이 좋으면 몇 마리의 사슴 무리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Grandview Point나 Moran Point, Lipan Point, Navajo Point 등에 들러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협곡의 모습을 담기도 했다.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이런 즐거움을 간직한 국유림 속의 드라이브는 아까울 만큼 시간이 금세 지나간다. 

이곳은 그랜드 캐니언의 동쪽을 품에 넣을 수 있는 Desert View가 있기에 더욱 소중한 루트다. 이 전망대도 Mather Point에 버금가는 핵심 구역이다.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아담한 방문객 센터 그리고 몇몇 서비스 건물 등 많은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엄청나게 넓은 그랜드캐니언의 모든 비경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신 각 구역을 대표하는 전망대 정도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상당히 성공한 여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outh Rim의 Mather Point와 Hermits Rest 그리고 동쪽의 Desert View, North Rim의 Bright Angel Point 등이 그것이다.
1932년에 완성된 21m 높이의 Desert View Watchtower에 올라가면 대단한 전경이 펼쳐진다. Mather Point 쪽에서는 보이지 않던 콜로라도강이지만, 이곳은 30km나 거슬러 온 상류 쪽이기 때문에 협곡의 깊이가 낮아지고 그 폭도 줄어들기에, 여전히 멀지만 유유히 흘러가는 그 모습을 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낮아진 깊이만큼 강물에 의해 침식된 지형의 다양한 모습과 과정을 관찰하기에도 유리하다.

타워 내부는 좁지만 아담한 가게가 있고 또 꼭대기까지 연결된 나선형 계단은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부산스러움에도 매우 재미있는 경험이다. 그랜드캐니언 주변에서 주워 온 돌들로 쌓아올린 타워라 그런지 이곳과 잘 어울리는 듯하다. 과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관광객의 놀이터가 되는, 건축물로서 본연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다.



Little Colorado River
Desert View를 빠져나와 64번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리면 점차 고원지대에서 벗어나면서 고도가 낮아진다. 도로의 경사는 완만하게 내려가면서 Desert View에서는 2,270m에 이르렀던 해발고도가 89번 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는 1,340m까지 낮아진다. 거의 1,000m를 내려가는 셈이다. 이렇게 달리는 동안 Kaibab 국유림을 벗어나면서 푸른색의 숲은 어느덧 멀어지고, 주변의 풍경은 노란색의 황량한 대지로 변화한다. 숲이 주는 아늑함과 달리 이런 건조한 기후의 지형은 삭막하게 느껴지고는 한다. 대신 탁 트인 시야와 넓은 평원은 고독한 드라이브를 즐기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배경이다. 

이대로 시원스레 뻗은 도로를 달려 페이지로 가도 되지만, 급하지 않다면 그랜드캐니언이 형성된 초기의 침식작용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조그만 사이트에 들러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사이트는 그랜드캐니언의 콜로라도강 본류로 흘러가는 지류로, 작은 콜로라도강(Little Colorado River)이라고 불리는 이 강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나바호 부족의 영역(Little Colorado River Navajo Tribal Park)이지만, 입장료는 따로 없고 또 작고 허름한 판자 건물에서 기념품 등을 팔고 있다. 
64번 도로를 타고 Kaibab 국유림을 벗어나 황무지에 들어서면 왼편에서 진입할 수 있으나, 딱히 간판도 없고 또 이정표도 세워져 있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 쉽다. 구글맵에 등록되어 있으니, 들렀다 가고 싶다면 목적지를 설정한 후 가는 것이 편하다.
이곳으로 진입하면 곧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딱히 주차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부족하지만 몇몇 차량들이 공터에 주차를 해 놓았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곳에 차를 대면 된다. 그리고 강가까지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작은 콜로라도강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끝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 지역은 고도가 많이 낮아진 만큼 절벽에서 강 수면까지의 깊이가 어마어마하지는 않다. 사실, 그랜드캐니언에 비해 절벽의 높이가 낮다는 것이지 그 아찔함은 상당하다. 작은 협곡이지만 깍아지른 절벽과 그 아래 흐르는 누런 리틀 콜로라도강이 굽이져 흐르고 있고, 침식으로 인해 거칠게 무너진 암석들이 곳곳에 있어 그랜드캐니언의 원시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침식작용이 수백만 년을 거쳐 지속되면서 저 거대한 그랜드캐니언을 형성시킨 것이다. 지질학적 시간이란 마치 우주의 크기를 인간의 머리로 담아내기 어렵듯, 인류의 경험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눈으로 침식의 모습을 잡아낼 수 없지만, 1년에 고작 1mm씩 진행되는 침식의 깊이도 백만 년이 지나면 1,000,000mm 즉 1km가 된다. 이렇듯 백만 년이라는 시간은 백만 원이나 백만 달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크기인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약 45억 년, 현생 인류의 기원을 크로마뇽인(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 둔다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5만 년,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잘해 봐야 100년에 불과하다. 최초의 크로마뇽인이 그랜드캐니언을 보았다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Page로 가는 길
64번 도로는 카메론(Cameron) 인근에서 89번 도로를 만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이 89번 도로로 올라탄 후 북쪽으로 달린다. 이곳은 대단한 풍경을 보여 주지는 않지만, 이 지역의 가장 보편적인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몽골인들이 달렸던 그 초원과 사막처럼, 이곳도 인디언들이 곳곳에 흩어져 살며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다. 먼 바다 건너 신대륙의 땅도 이미 오랜전에 유목민의 말발굽이 지배했

던 곳에 불과했다.

루즈 기능을 사용해 제한속도 언저리에 속도를 맞추고 편안하게 운전을 이어 간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도로와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나아갈 뿐이다. 이리저리 주변의 트래픽을 살필 필요도 없이 내 눈에 들어오는 모습을 즐기며 한참을 달린다.
중간에 페이지로 가는 또 다른 도로인 20번 도로가 오른쪽으로 갈라진다. 이 길이 페이지까지 가는 데 있어 조금 더 빠른 루트이기 때문에 구글맵은 보통 이 길로 안내한다. 이 도로로 가도 별 문제는 없지만, 마블 캐니언(Marble Canyon)의 나바호 다리(Navajo Bridge)나 호스슈 밴드(Horseshoe Bend)로 가기 위해서는 옆길로 새지 말고 이 89번 도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 89A 도로가 분기되는 Bitter Springs 마을에 다다른다. 여기서 89A를 타고 가면 나바호 다리(Navajo Bridge)를 건너고, 버밀리언 클리프스 국가기념물(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의 남쪽 가장자리를 달려 그랜드캐니언의 North Rim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한참 가야 한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드라이브를 선사해 주게 되니, 이 여정은 내일 이어 가도록 하자.
이 마을에서 89번 도로를 유지하면 왼쪽으로 89A 도로가 뻗어 있는 아름다운 평원을 바라보며 언덕을 달리는 Antelope Pass에 올라서게 된다. 고도차가 큰 두 평원이 만나는 절벽을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가는 이런 도로는 태생적으로 훌륭한 뷰를 자랑할 수밖에 없다. 점점 높아지는 도로와 그럴수록 높게 굽어보는 대지의 풍경은 저무는 태양과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이런 도로의 정상 부근에는 멋진 전망대(Vista Point)가 주차장과 함께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다. 여행객이라면 머물다 갈 수밖에 없는 포인트다. 이곳을 그냥 지나쳤다면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늦은 오후의 태양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 누런 대지는 저무는 노을과 함께 더욱 짙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지형은 단조롭지만 눈을 떼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공간과 시간의 조합이 완벽하다. 이런 장면을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사진 기술이 없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해가 지기 전에 페이지에 도착하고자 다시 차를 되돌려 나온다.
페이지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날은 점점 어둑해진다. 제법 길었던 하루의 일정이 끝나 간다. 시간이 남았더라면 호스슈 밴드(Horseshoe Bend)에 들렀다 가고 싶지만, 내일 이 길을 다시 와야 하니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고 애써 외면하듯이 지나간다. 그곳의 풍경을 기억하고 또 그 가치를 알기에 빼놓고 싶지 않지만 이미 날이 저물고 있다. 오늘은 너무 많을 곳을 거쳤다. 이젠 좀 쉬어야 할 것 같다.


Courtyard Page at Lake Powell
해가 지고 어스름할 무렵에야 페이지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관광객이 머물거나 거쳐 가는 그랜드 서클(Grand Circle)의 중심 도시지만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특히 이 숙소는 중심가에서 떨어져 있어 해가 지면 칠흑 같은 어둠과 쥐 죽은 듯한 적막감으로 휩싸인다. 호텔 주변의 희미한 불빛만이 쏟아지는 별빛을 교란시키며 어둠을 비추고 있다.
처음 페이지에 왔을 때 이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이렇게 다시 찾고 있다. 다른 곳으로 옮겨 볼까 생각해 봤지만, 이런 류의 호텔이 다들 고만고만하고 또 이곳의 위치나 룸 컨디션 등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전자레인지가 없다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왜 전자레인지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어느 호텔과 헷갈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여정에서 전자레인지의 중요성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중요한 아이템이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3박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나의 실수를 자책하며 로비로 내려간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식당은 참 마음에 든다. 로비에 위치한 이 레스토랑은 바와 식당이 분리되어 있는데, 식사도 괜찮지만 조용히 여행의 기억을 되돌리며 동반자와 한잔 기울이기 좋은 바도 상당히 마음에 든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친절한 바텐더의 붉은 얼굴이 이 페이지의 대지를 닮았다. 햄버거와 맥주 한 잔으로 훌륭한 저녁 식사를 마친다. 역시 햄버거는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이런 식당에서 정식으로 먹어 줘야 제맛이다. 양이 적은 우리에게는 목구멍까지 찰 만큼 양이 많았다. 배도 든든히 채웠으니, 이제 호텔 밖으로 나가 본다. 대지는 이미 차게 식어 가고 있고, 살짝 불어오는 바람은 몸을 으스스 떨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 상쾌함이 무척이나 만족스럽게 다가온다. 

예전에 왔을 때 조그만 토끼들이 뛰놀던 그 잔디밭은 사라졌고, 그 대신 테슬라의 급속충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테슬라로 미 서부를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가능한지를 모르겠다. 페이지나 모압(Moab) 등 그런 수준의 도시에 있는 호텔에는 종종 이런 충전소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기는 했으나 매우 드문 것으로 기억한다. 더군다나 미 서부가 조그만 동네도 아니고, 그 넓은 면적에 드문드문 위치한 마을의 상당수는 작은 읍내 수준에 불과하다. 그런 마을에서는 아직 이런 충전소를 본 적이 없다. 앞으로 이런 시설이 일반 주요소의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더욱 많은 숙소에 설치되지 않는다면, 저 텅 빈 전기차 전용 주차장에서 보듯이 미 서부 여행에서 전기차를 이용하기는 아직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매연이 없는 전기차는 어쩌면 이 대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기에 적합한 기계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테슬라와 같은 전기차가 대도시뿐만 아니라 더 멀리 대륙의 구석구석으로 얼마나 촘촘히 퍼져 나갈 수 있을지 기대되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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