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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랜드 캐년 노스림(North Rim)으로 가는 길 1 / 마블캐년과 버밀리언 클리프를 지나며

미서부/미서부 16,000km의 여행기록

by 라임스톤 2019. 8. 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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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Rim으로 가는 날
페이지에서의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맑은 듯하다. 이전에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흐린 하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전날 아무리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일지라도 오늘같이 화창한 아침은 또다시 기운을 복돋아 주고,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영양제와도 같다.
특히 오늘은 새로운 기대감으로 가득하다. North Rim에 대한 기대감은 물론 그곳으로 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도로에 대한 갈망이 오히려 앞선다. 89A 도로도 반갑겠지만, 그랜드캐니언 North Rim의 북쪽을 덮고 있는 Kaibab 국유림과 이를 가로지르는 67번 도로에 대한 설렘이 더욱 크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처음 가 보는 도로가 포함된 날의 여정은 특히나 활기찬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North Rim까지의 거리가 아주 먼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위대한 국립공원을 돌아보는 여정은 시간을 한없이 잡아먹게 만든다. 어쨌든 페이지로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되니, 그 시간이 늦은 밤이어도 상관없지 않겠나. 오늘은 마음을 더욱 여유롭게 풀어헤치고, 그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



Marble Canyon
페이지를 출발해 어제 타고 온 89번 도로를 다시 달려 89A가 분기되는 Bitter Springs로 내려간다. 페이지에서 North Rim의 끝까지는 대략 200km로, 그리 먼 길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늦장을 부리지 않고 여느 때보다 좀 더 서둘렀다. North Rim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조금이라도 더 여유롭게 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 서부의 그랜드 서클 지역을 달리는 도로는 누구에게나 각별한 인상을 심어 준다. 때로는 지평선까지 쭉 뻗은 도로와 구불구불 휘어져 나가는 도로 등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터라 그 광경이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 버린다. 그리고 그중에는 여행객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받는 도로들이 있다. 


이런 멋진 도로들 중에 어떤 길이 가장 좋았는지 순위를 매기는 것은 대단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개인마다 성향이 다르니, 그 순위를 매기는 것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도로 번호만 다를 뿐 모두 그랜드 서클을 달리는 하나의 유기적인 도로들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랜드 서클을 달리는 도로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고 마음에 드는 구간을 뽑는다면, 바로 오늘 달리는 도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물론 모뉴먼트 밸리 앞을 달리는 163번 도로, 캐피톨 리프 국립공원으로 향하는 24번 도로, 브라이스 캐니언으로 가는 12번 도로 그리고 자이언 국립공원을 지나가는 9번 도로 등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훌륭하다. 
89A 도로가 이어진 마블 캐니언(Marble Canyon) 일대와 버밀리언 클리프 국가기념물(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의 남쪽 지역은 전형적인 사막기후로 인해 숲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적나라하게 노출된 평원과 그 표면을 긁어 놓은 침식(erosion)의 계곡들이 어울려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와일드하고 원초적인 풍경을 바라보며 운전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지나 Kaibab 국유림으로 진입하면 우거진 숲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하고, Jacob Lake 마을과 North Rim의 끝을 잇는 67번 도로에서는 환상적인 아스펜(Aspen) 나무를 필두로 울창한 숲과 초원이 펼쳐진 한랭한 삼림 지역의 전형적인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전혀 다른 기후와 대지의 풍경은 오늘 달리는 구간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펼쳐지며, 그만큼 두 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각각의 기후대에서 보여 주는 풍경의 수준 역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만큼 최고라고 단언하고 싶다. 차라리 차를 버리고 그보다 훨씬 느린 두 다리로 느릿느릿 걸으며 그 공간에 지배당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다 다리가 아프면 자전거로 갈아타도 좋을 것이다. 미 서부를 여행하다 보면 자전거를 차에 매달고 다니는 수많은 차량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미 서부를 즐기는 방식처럼, 이런 도로를 달릴 때마다 나도 언젠가 그런 온전한 느림의 여행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강렬하게 솟아오르고는 한다.
North Rim으로 가는 루트에 비견될 만한 도로가 콜로라도나 와이오밍 등 앞으로의 여정 속에서 다가오겠지만, 오늘 이 루트를 달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행복이자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89A 도로로 갈아타고 북쪽의 마블 캐니언(Marble Canyon)으로 향한다. 오른쪽에는 거대한 클리프(Cliff ; 침식 등 지질학적 요인에 의해 수직으로 노출된 절벽)가 도로와 평행하게 달리고, 왼쪽에는 거친 평원이 군데군데 파인 계곡과 함께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런 곳에서 어찌 차를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그렇게 달리다 보니, 콜로라도강이 만든 좁은 협곡인 마블 캐니언에 다다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마블 캐니언이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대체로 북쪽의 Lees Ferry부터 남쪽의 Little Colorado River가 합류하는 부근 사이의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좁은 협곡 지역을 일컫는데 이 역시 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에 속한다. 콜로라도강은 파월호수(Lake Powell)를 만든 글렌캐니언댐(Glen Canyon Dam)에서 Little Colorado River가 합류하는 부근까지 상대적으로 좁은 협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이후로 협곡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면서 그랜드캐니언을 만들고 있다.



이 마블 캐니언을 건너는 나바호 다리(Navajo Bridge)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1929년에 개통된 옛 다리는 세월이 흐르면서 늘어난 교통량과 무거워진 차량 그리고 좁은 도로폭 등으로 인해 더 이상 트래픽을 감당할 만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 1993년에 277m 길이의 새로운 다리를 바로 옆에 건설하기 시작해 1995년에 개통하게 되었다. 그리고 옛 다리는 그 양쪽 끝에 주차장과 방문객 센터를 설립하는 등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에게 다리 위를 거닐며 콜로라도강과 그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해 주는 훌륭한 시설물로 탈바꿈했다. 


어느 쪽에 주차해도 상관은 없지만, 다리를 건너 방문객 센터가 있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다리로 올라선다. 콜로라도강을 이렇게 바로 위에서 가까이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강 아래까지 140m에 이르는 아찔한 높이와 직각의 절벽 그리고 그 바닥에 흐르는 푸른 콜로라도강의 아름다움은 이곳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이곳에서 Lees Ferry 구역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있는데, 배를 타는 일정이 없어도 시간이 난다면 한 번쯤 다녀오는 것도 좋은 선택일 듯하다. 그곳에서 출발하는 다양한 보트 투어와 해상 스포츠를 통해 위로는 호스슈 밴드로 갈 수 있고 또 아래로는 콜로라도 강을 따라 내려가 며칠에 걸친 래프팅과 하이킹을 즐기며 그랜드캐니언까지 갈 수 있는 투어가 다양하다고 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기회가 된다면 바닥의 강물을 타고 그랜드캐니언을 즐기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외국인 여행객이 이런 투어까지 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겠지만, 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간에 그런 투어를 하게 된다면 그랜드캐니언을 정말 완벽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내게도 역시 쉽지 않은 희망인 만큼, 살며시 위시리스트에 올려만 놓는다. 


그나저나 저 다리 아래 날개를 쉬고 있는 저 새는 아무리 봐도 그 희귀하다는 캘리포니아 콘도르(California Condor)인 듯하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동식물 보존 계획이었다는 저 귀한 새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리라.


방문객 센터에 들어가니 여러 기념품과 서적을 판매하고 있다. 책을 볼 때마다 욕심이 자꾸 생기지만, 무거워질 캐리어를 생각하며 이번에는 필사적으로 참는다. 미 서부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과 관련 지식을 담고 있는 저런 책들을 책장 한편에 꽂아 놓고 두고두고 볼 수 있다면, 이곳에서의 추억을 되새기거나 새로운 여정을 꿈꾸며 미처 가 보지 못한 곳을 스케치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
다리를 지나면 Kaibab 국유림에 들어가기 전까지 도로 오른쪽에 숨겨진 땅 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를 두고 한참 동안 삭막한 누런 대지를 끝없이 달리게 된다. 때로는 오랜 시간에 걸친 풍화작용(weathering)이 만들어 낸 기이한 버섯 모양의 바위도 한 자리 차지하며 누런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다. 인디언의 집이었는지, 아니면 초기 개척자들이 만든 집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치 이글루처럼 돌을 쌓아 만든 벽돌집이 오랜 세월을 간직한 채 다소 을씨년스럽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척박해 보이는 이런 땅이 인디언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인디언들은 이곳 흙먼지 날리는 도로가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간소한 기념품과 그들의 향수를 담은 목공품들을 팔고 있다. 그들의 삶이 이 땅만큼이나 척박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저 절벽 너머의 땅 Vermilion Cliffs는 신비한 지질과 지형으로 가득 찬 곳이다. 콜로라도강이 흐르는 하부의 고원(plateau)보다 조금 높은 곳에 펼쳐진 저 상부 고원지역에는 쉽게 진입할 수가 없다. 보통의 공원들은 언제 어느 때든 상관없이 누구든 제약을 받지 않고 구경할 수 있지만, 이 Vermilion Cliffs National Monument 지역은 매일 수십 명에게만 그 입장을 허락한다. 다시 말해, 사전에 온라인 추첨이나 당일 추첨 등을 통해 선정된 사람들만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정해진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외국인 여행자는 웬만해서 가 보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아무튼 소수에게만 관람을 허락했다는 것은 그만큼 보존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 혹시라도 이 공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공부한 후 정말 가 볼 계획을 세웠다면 원하는 날짜에 방문할 수 있도록 미리 온라인 접수를 시도해 당첨을 기대해야 한다. 그러나 그마저 여의치 않다면 Kanab에 있는 Grand Staircase-Escalante National Monument Visitor Center에 직접 방문해 상황을 조율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 역시 막연히 가 보고 싶은 곳으로 위시리스트에 올려만 놨을 뿐 직접 시도해 본 적이 없어 도움이 될 만한 팁은 줄 수가 없다. 
하지만 그곳은 오직 거친 비포장도로와 두 다리로만 걷을 수 있을 뿐인 트레일만이 소중한 유산에 생긴 흠집일 뿐이다. 그 외에는 거의 완벽히 보존된 자연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미 서부의 웬만한 곳을 모두 돌아본 중급자 이상이라면, 이런 곳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렇다. 이 넓은 서부를 자동차만으로 족적을 남기는 것은 매우 제한된 여정이기 때문에 가 볼 수 있는 곳도 한계가 있다. 두 다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귀한 것들은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차를 몰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걸을 시간까지 마련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다. 우리는 애당초 너무 치열한 나라에 태어났다.



Kaibab National Forest
수십 킬로미터를 직진하던 도로는 평평한 평원을 끝으로, 이제 저 앞으로는 거대한 고원지대의 숲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 막바지에 오른쪽으로 갈라진 비포장도로 입구에는 그 거친 맨땅의 도로로 들어갈 몇 대의 SUV 차량이 Vermilion Cliffs로의 여정을 준비하는 듯하다. 그 오프로드의 끝은 북쪽의 89번 도로까지 연결되어 있을 것이고, 그 중간중간에 Vermilion Cliffs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트레일의 시작점이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창밖으로 그들의 여정을 부러워하며, 잠시 후 오르막 길을 마주한다. 그리고 숲의 땅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저 뒤의 사막 같은 평원과는 달리, Kaibab 국유림에 들어서자마자 도로는 심하게 구불거리며 경사로를 올라간다. 그렇게 서너번 큰 곡선을 그리더니 이제껏 달려온 평원 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Vista Point가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 주차를 하고 저 멀리 동쪽을 내려다본다. 두툼한 팬케이크를 붙여 놓은 듯한 Vermilion Cliff의 지형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좀 전에 달렸던 도로와 평원이 적막하게 놓여 있다. 훌륭한 전경이다. 여기 있는 모든 방문객이 저마다 그 풍경을 눈에 넣고자 혈안이다. 사진보다 눈에 비친 풍경이 압도적이겠지만, 그렇게라도 남겨야만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건너편 도로로 눈을 돌리니 Kaibab 국유림과 Vermilion Cliff의 지형이 뚜렷이 대비된다. 왼쪽은 숲으로 덮인 국유림, 오른쪽은 헐벗은 Cliff가 서로 접하면서 그 사이로 비포장도로가 북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도로의 고도가 조금씩 올라가면서 숲은 더욱 짙어진다. 시원스레 반듯이 자란 나무들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며 도로를 둘러싸고 있다. 차량도 간간히 오갈 뿐 한가로움이 가득한 도로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피부를 스치자,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다. 그 바람 속에 짙은 숲의 냄새가 한가득 배어 있다.



Jacob Lake
어제는 South Rim의 Desert View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64번 도로를 따라 숲에서 사막으로 내려갔지만, 오늘은 그와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며 이번에는 사막에서 숲으로 올라가고 있다. 나바호 다리가 있던 곳의 해발고도는 약 1,070m에 이르며, 그 이후 Kaibab 국유림까지 약 45km를 달리는 동안 별달리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높아진 고도는 그 경계에 이르러서는 1,600m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국유림을 달려 North Rim으로 가는 길목인 Jacob Lake에 도착하면 고도는 약 2,200m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랜드캐니언의 평균적인 고도에 들어선 것이다.
이 조그만 마을에서(사실 마을이라고 하기보다는 North Rim으로 가는 캠프 정도로 봐야 할 듯하다) North Rim으로 내려가는 67번 도로가 시작된다. 89A와 67번이 만나는 이 삼거리 한쪽에 마련된 주요소와 숙박 업체 그리고 Kaibab 방문객 센터가 시설의 전부다. 하지만 North Rim을 찾는 이들에게 있어 이곳은 매우 중요한 시작점이자 쉼터가 된다. 


우선, 차를 몰아 주요소로 들어간다. 아직 1/3 이상 남았지만, 이 차는 트렁크가 넓어서 좋을 뿐 6기통 미국 엔진이라 기름을 너무 많이 먹는다. 여기 주유소도 기름값이 상당하지만, 그랜드캐니언으로 들어갈수록 기름값이 비싸지니 이곳에서 가득 채워 놓는 게 마음도 편하고 또 비용도 조금 아낄 수 있을 듯하다. 어딜 가든 공원에 가까워지면 대체로 기름값이 비싸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도시가 작고 주유소가 드물수록 기름값이 올라가므로, 오늘 거치게 될 사이트와 거리를 생각해 되도록 큰 도시에서 조금이라도 저렴한 비용으로 연료통을 가득 채워 놓는 것이 좋다. 물론 미국 기름값이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지만 주(state) 마다 차이가 크고 또 워낙 먼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여행인 만큼 주유비도 무시할 수준이 못된다. 갤런(1 미국 갤런은 약 3.8리터)당 2불 초반대로 넣다가 갑자기 3불대에 육박하면 차를 좀 더 살살 몰아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리터 단위가 아닌 갤런 단위라 곧바로 정확한 비교가 안되니 체감이 더디지만, 사실 비슷한 양을 넣었는데도 10불 짜리를 하나 더 지불해야 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가슴이 더욱 쓰라릴 것이다. 


기름을 가득 넣고 나니 마음이 든든하다. 차를 모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심정을 알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널린 게 주요소인데 연료통을 가득 채운 것이 뭔 대수냐, 하겠지만 운전자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만도 않다. 하물며 넓은 미국에서는 기름칸이 반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찜찜해지기 시작하는 것이 여행자의 마음이다. 이렇게 가득 채우고 나면 하루가 든든하다.
주유소 옆에 자리한 Jacob lake Inn 앞에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숙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이곳은 상당히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숙박은 하지 않으니 알 수 없지만, 식당은 매우 훌륭하다. 인디언과 관련된 소품을 비롯해 여러 가지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식당을 화사하게 치장하고 있어 아늑하고 엔틱한 느낌이 든다. 매우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친절한 웨이트리스가 클래식한 나무 책상 옆의 테이블로 자리를 안내해 준다. 다른 자리에 비해 유난히 눈에 띌 만큼 여러 인형과 장식품으로 가장 예쁘게 꾸민 듯하다. 그리고 늘 그렇듯, 메뉴 선택이 어려울 때 주문하게 되는 만만한 햄버거를 기다리며 식당의 분위기를 천천히 느껴본다. 


North Rim으로 가는 길목의 이 식당을 잊지 못할 것 같다. 훌륭했던 햄버거만큼이나 멋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이 식당을 나와 따스한 햇빛을 받으며 잠시 동안 의자에 앉아 포만감이 잔뜩 느껴지는 배를 두드리며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에 젖는다.
지금까지의 여정 중 가장 만족스럽고 행복한 점심이다. 달려온 길도, 지금 여기도, 그리고 앞으로 달릴 길에 대한 기대감도 오늘의 점심시간을 완성시킨 주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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