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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LA에서 라스베가스로 가는 도중 맞닥뜨린 위험한 순간

미서부/미서부 16,000km의 여행기록

by 라임스톤 2019. 5. 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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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의 중심 지역은 해발 고도 100m 이하의 저지대에 위치한다. 15번 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도심권을 빠져나가면 크게 굽은 도로를 따라 한참 올라가게 된다. 주변 풍경은 이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또 와일드한 산들은 또 다른 캘리포니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이 삼림 지역은 로스앤젤레스와 라스베이거스를 잇는 15번 도로상에서 전혀 다른 지형 및 기후 특성을 구분짓는 역할을 한다. 
남쪽으로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전형적인 날씨를, 북쪽으로는 건조한 사막 기후를 보인다. 저 산맥을 넘어서면 쭉 뻗은 고속도로 주변으로 황량한 누런 불모지가 펼쳐진다.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이 풍경은 더 깊숙한 곳에 펼쳐질 미 서부의 실체에 대한 상상을 부채질하게 된다. 
처음 이곳을 달리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인상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좁은 국토에 사는 사람들은 훨씬 더 특별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넓은 미 서부를 다니면서 갖게 될 수많은 감동과 기억에 비한다면, 이 도로에서의 인상은 정말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첫인상은 그 중요성에 비해 오래 가기 마련이다. 설사 누군가의 여행이 LA와 라스베이거스를 왕복하는 것이 전부일지라도 자신이 직접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 도로를 달린다면 4~5시간의 운전은 충분하지는 않아도 분명 의미 있는 영감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한 영감은 다른 도로에 대한 갈증을 불러올 테고, 그렇게 누군가는 더 깊은 미 서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위험한 순간
화들짝 놀라며 운전대를 다잡는다. 순간 식은땀과 함께 서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소름이 돋는다. 잠시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차선인지 3차선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는 분명 다른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서 정신을 차린 순간 내 차는 4차선을 넘어서 갓길 쪽으로 바퀴 하나를 살며시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언제 4차선으로 왔지? 나는 졸음 운전을 했던 것이다. 
사실 졸음의 시작은 얼마 전부터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산맥을 넘어 끝없이 직진하는 평탄한 사막 지역으로 들어선 후 눈이 본격적으로 감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 평생 이렇게 지독한 졸음과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시차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운전을 했다는 데서 단순히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도 이 정도의 상황은 있었고, 나른하지만 졸음이 밀려와 운전을 심각히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상황을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수면제였다.
장시간의 비행을 결코 좋아하지 않던 나로서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수면제 처방을 받은 것이다. 가장 약한 수면제였지만···. 아무튼 나는 의사에게 애로 사항을 피력했고, 약간의 수면제를 처방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잠을 잘 자는 편이라 불면증과는 거리가 멀었고 또 수면제를 먹어 본 적도 없었다. 단지 11시간의 비행 시간을 수면제 한 알로 편히 잊을 수 있으리라는 달콤한 계획을 첫 기내식 이후 실천에 옮겼고, 얼마간은 그 불편함과 고통을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만 컸지, 잠은 오지 않았다. 수면제를 자주 먹어 내성이 생긴 체질도 아니고, 처음 먹는 약이니 만큼 그 효과는 제일 약한 수면제일지라도 나를 꿈속으로 안내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30분이 지나도 잠이 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수면제가 약한 것이라 더 먹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비행기 안에서 이 정도의 수면제로는 별다른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영화를 봐야만 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을 내야 했다. 그러나 영화를 감상하는 데도 지친 나는 다시 한 번 시도를 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착 시간이 다가오지 않는 것을 한탄하며 힘겨워하던 나는 수면제 한 알을 더 먹어 본 것이다. 그것도 도착 서너 시간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라리 처음부터 두 알을 먹었든지, 아니면 아예 수면제 처방을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도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나는 수면제 효과에 대한 의구심과 궁금증을 뒤로한 채 비행기에서 내렸고, 지금 이렇게 차를 달려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약 효과가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던 것이다. 수면제 효과가 이렇듯 한참이나 늦게 올 수도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수면제에 대한 지식이 없다 보니 확실하진 않지만 이전에 결코 겪어 본 적 없는 이 처참한 졸음은 분명 그 수면제가 증폭시키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사실, 졸음이 몰려오면서 중간에 잠시 쉬어 가야겠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으나 장소를 결정하지 못한 채 Victorville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좀 더 달려 Barstow까지 가려고 했다. 반면 내 졸음은 거기까지 기다려 주지 못한 채 이런 위험한 상황으로 이끌고 말았다. 
눈을 뜬 그 순간에는 처음부터 4차선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기를 절실히 바랐다. 그러나 몽롱한 기억을 되짚어 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님을 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은 행위와 판단을 처절히 반성하며 온몸에 덕지덕지 스며든 졸음을 제거하려 애를 썼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운이 좋았을 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차선을 옮겼다는 것은 사고를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도 여정의 첫 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놀란 가슴에 졸음은 달아났지만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그 상황이 떠나가지 않았다. 20년에 가까운 내 무사고 경력을 미국에서 지울 뻔했다.
이 상황에 이르게 한 모든 판단과 과정을 반성하며, 그리고 액땜이라고 스스로 치부했다. 얼마 후 Barstow에 이르렀고 인앤아웃 버거에 찾아가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인앤아웃 버거



심각한 위기를 겪은 직후였지만, 인앤아웃 버거는 역시 캘리포니아의 합리적인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렴한 수준의 가격에 비해 맛은 상당히 훌륭하다.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는 어느 미국산 햄버거 체인점에 비해 월등하지 않나 싶다. 
차량으로 이동한 후 짧지만 앞으로 남은 운전 시간을 버티게 해줄 만큼의 쪽잠을 청했다. 잠시 후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외국 여행에서 다시는 그런 상황에 이르지 않겠다는 신중한 다짐을 하며 다시 사막을 달린다.

저기 저 라스베이거스
라스베이거스에 가까워지자 정신은 더욱 또렷해진다. 15번 도로 선상, 캘리포니아에서 네바다로 넘어가는 주 경계에 있는 그 첫 도시 Primm···. 이곳은 작은 도시지만 나름 화려한 간판으로 치장된 저 리조트와 카지노가 이곳이 네바다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황량한 황무지 위의 뜬금없는 듯한 저 도시가 “원래 네바다는 이런 곳이야!” 라고 말하며 환영해 주는 듯하다. 이 카지노 마을마저 네바다의 격정을 뿜어내고 있는 터인데, 라스베이거스야 말해 뭐할까.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길이 좀 더 설레기 시작한다. 태양은 왼쪽 지평선 위에서 아직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아직 해가 질 저녁은 좀 더 있어야 한다. 낮보다는 밤이 원래의 모습인 것이 분명한 라스베이거스지만, 이렇게 고속도로를 달려 접근하는 라스베이거스의 스카이라인은 낮에 그 형태를 더욱 분명히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리고 다시 찾아와도 여전히 가슴 뭉클한 흥분과 설렘 그리고 졸부가 느꼈을 것 같은 초라한 격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대도시가 아름다울 수 있는 데는 그 정체성으로 대변되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라스베이거스는 다른 어떤 대도시보다도 인위적이고 또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아름다움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다른 대상과 비교할 필요 없는 독특한 개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타고난 자연 미인이 아닌 완벽한 성형 미인 같은 도시···.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유럽의 유구한 역사 위에 세워진 도시에서 맞볼 수 있는 감성적인 문명의 향기와 감동은 없다. 그런 곳은 유럽에서 찾도록 하고, 여기 라스베이거스를 찾는다면 온 몸의 신경을 말랑말랑하게 다져주는 인간의 원초적 감성에 더 호응해 줘야만 한다.

 

Sign in daytime, Las Vegas, Nevada_photo by Highsmith, Carol 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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